주말이면 종종 아이들과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시간을 가진다. 오롯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좋기도 하고, 좋은 미디어 콘텐츠를 같이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 속에 공감대와 친밀감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혼자 보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아이들과 넷플릭스를 통해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이라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 주인공 나희도가 펜싱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에서 각종 유치한 플레이를 하는 상대 선수 때문에 집중력을 잃어버린 후 자신 없어 하자, 옆에 있던 코치가 흔들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야, 나희도, 니 자신을 못 믿겠으면 니를 선택한 내를 믿어라. 니 안진다. 내는 원래 지는 선수 안 뽑는다. 오케이?”

이 장면은 유독 나에게만 슬로우 모션과 슬로우 사운드로 재생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또렷이 전달되었다. “니이 자신으을 못 믿겠으며언 니이를 선택하안 내에를 미이더라아~” 우연히 마주한 이 한 줄의 대사가 무방비 상태였던 마음에 들어와 세차게 흔들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두 눈에 뜬금없는 이슬 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드라마를 같이 보고 있던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아무도 모르게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내가 생각해도 이 타이밍이 울컥할 타이밍은 아닌데… 난감했다. 이 장면은 자신이 없어진 나에게, 그래서 더 나아갈 용기가 없는 나에게, 한없이 소심해 진 나에게, 나를 선택하신 그 분, 항상 나를 믿어주시고 지지해 주시는 든든한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내 심장에 확성기를 대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분이 곁에서 ‘불완전한 네가 아니라 완전한 나를 믿고 나아가라.’ 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말이 그 순간 나에게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말씀을 묵상하면서 속상하고 답답했던 시간이 있었다. 매년 이맘때마다 해오던 묵상인데, 올해는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고 큰소리로 다그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삿대질하는 군중들, 기적이나 한 번 구경하고자 죄가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을 이리저리 재며 희롱하는 권력자들, 예수님을 모욕하고 함부로 박대하는 로마 군인들…. 이 모든 상황으로 인해 예수님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셨을지 피부에 와 닿았고 큰 돌덩이에 가슴이 눌리는 듯 숨을 쉬기 어려웠다. 아무 잘못도 없으신 분이 왜 그런 수모를 그대로 다 받아 들이셨는지 묻고 또 물으며 깊은 연민에 휩싸였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크게 한 방 먹이면 시원할 것 같았지만, 헤롯이 여러 질문을 할 때에도 예수님은 그저 침묵하셨고,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언도할 때에도 기대했던 한 방은 없었다.

불의에 대해 힘겨워하는 상처와 아픔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전 10:23)라는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침묵하던 시간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 더 아프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 ‘답답했다’가 더 근접한 표현일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저들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셔야 하죠?” 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내 앞에는 한없이 결백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신 예수님이 계셨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무리를 끌고 왔을 때, 제자 중 한 명이 화가 나서 대제사장 종의 귀를 쳤는데 예수님은 이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때까지도 나의 속상함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 날, 혼자 시무룩하게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다가와 가만히 안아 주시는 것을 느꼈다. 심장으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번져나가 온몸으로 온기가 맴돌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그 일을 당하신 것은 바로 나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이루시려고 그 일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친히 희생과 인내를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나는 그 분을 따르며 고난에 동참하기로 했다. 주님은 이미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셨고, 위로해 주셨고, 꼬옥 안아 주셨다. 나의 모든 고뇌와 상황을 아시는 주님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라 감사와 감격의 고백을 올려 드렸다.

이 글이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솔직하게 더 드러내야 할 부분이 있다. 부끄럽게도 나의 그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대로 대의(大意)를 위해 살려고 발버둥 치다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사탄의 카운트 펀치 후에 바로 날아든 어퍼컷에 멘탈이 흔들리고 나서, 나는 예수님의 발꿈치도 쫓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따뜻하고 섬세하게 다독여 주신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했고, 정의를 위해 일부러 불의를 향해 맞서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난해한 침묵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음에도, 내 마음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여린 강아지풀 같았다. 특히 주님이 나를 안아 주셨던 경험은 매우 짙고 강렬했으며 컸기에, 이후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더욱 자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연약한 나를 이겨내기 위해 싸워나가는 이 싸움이 마냥 버겁고, 자신 없고, 힘에 겨웠다.

바로 이 시점에서, 나는 시작 부분에 언급한 <스물 다섯, 스물 하나> 드라마 속 펜싱 국가대표 선발 결승전 장면을 마주하고 있었다. 코치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야, 박사라, 니 자신을 못 믿겠으면 니를 선택한 내를 믿어라. 니 안진다. 내가 승리하도록 도와 줄끼다. 오케이?” 심.. 쿵.. 깜박이도 없이 훅 들어온 사랑 고백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저 드라마 하나를 보는데도 이것까지 사용해서 나를 일으켜 세우려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울컥함이 차 올랐다. ‘맞다. 나는 원래 못미더운 사람이다. 그런데 나를 선택하신 분은 완벽하게 신뢰할 만한 분이다. 그런 분이 나를 알아주셨고, 내가 아무리 흔들리고 넘어져도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믿어 주신다. 그 분은 나의 하나님,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주인공 나희도의 기가 막힌 독백이 이어졌다. ‘그래, 나는 아직 나를 못 믿어. 그런데 나를 알아봐 준 당신을 믿어. 그리고 나를 믿어준 당신을 믿어. 나는… 당신을 믿고 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주인공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당신을 믿고 간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온기 가득한 눈물을 무심히 소매로 스윽 닦아 내렸다. 그런 다음, 엷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번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래, 나는 당신을 믿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