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철 목사

분노는 불공평과 불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불공정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인신매매와 어린이 학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되는 반응은 분노입니다. 그런 건강한 분노가 있을 때, 사회의 부조리와 문제들은 수정되고 사회는 발전합니다. 이런 분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불공평과 불공정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인 인간이 죄인이기에 “의로운 분노”는 종종 “죄 된 분노”로 왜곡됩니다. 즉 분노 자체는 죄는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죄 된 분노를 품고 있다가, 그로 인해 증오, 쓴 뿌리,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고, 이는 우리를 파괴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죄 된 분노를 품고 있을 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사탄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오래 간직하지 말라고 명하면서 그 이유가 “마귀에게 틈”을 주기 않기 위함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 분노를 오래 품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수조 원) 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천만 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때, 왕이 분노하여 다시 그 종을 옥에 가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용서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용서는 옵션이 아닙니다.

죄를 탕감받은 사람에게 용서는 옵션이 아닙니다. 탕감받은 은혜의 수혜자로서 용서와 탕감의 은혜의 시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베푸는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2 용서는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을 내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손수레를 빌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반납할 때 보니까,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이때 나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수리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과 내가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 어느 쪽이든 누군가는 지불해야 합니다. 타이어가 펑크 나지 않은 것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의 본질은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탕감으로 인한 손해를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3 용서는 세 종류의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는 내가 빚을 탕감하는 것이므로, 용서와 동시에 나는 세 가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a. “나는 다시는 당신에게 이 문제를 가져오지 않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 이 문제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화해”를 위함이지 “보응”을 위함이 아닙니다.

b.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타인의 적절한 조언은 내가 문제를 지혜롭게 다루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남의 험담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좋은 것 위주로 이야기하고 남에 대해서는 나쁜 것을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c. “나는 이것을 다시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이 문제를 내 머릿속의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재생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4 내가 용서하지 않을 때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종은 타인의 빚을 탕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빚진 자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필요하게 능동적으로 되어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아주 작은 부분까지 나의 손해를 다 회수하려고 합니다. 일상의 작은 것이 용서되지 않을 때, 우리는 서서히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게임”에 집중합니다. 결국 피해자였던 나는 가해자가 됩니다.

5 용서의 실패는 이 땅과 영원한 나라에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음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먼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의 쓴 뿌리는, 먼저, 나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망칩니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왜곡이 일어나고 이 변화는 우리의 삶과 관계에 지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수평적 관계의 어려움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클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은 이 땅과 영원 안에서 대가를 지불합니다.

6 용서는 한 번의 이벤트이자 과정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490번을 용서하라 하십니다 (마 18:22).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그것은 한 번의 이벤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에게 그 원한 맺힌 일이 기억 날 때마다, 나는 계속 용서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용서할 것입니다.’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과정임을 기억하지 못할 때, 낙심과 죄책감은 우리의 삶에 엄습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하는 결심에도 남아 있는 상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분노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이벤트이자 과정입니다.

용서는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인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적지 않은 정신 병리 (psychopathology)는 용서 하지 못하는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타인을 용서하는 것을 쉽게 만듭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탕감 받은 빚 (수 조원)을 기억할 때, 나에게 빚진 자의 빚 (일천만원) 용서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기억하고 타인을 용서할 때 심령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